사군자(四君子)
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늦가을 모든 꽃들이 시들어갈 때 꿋꿋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칼날 같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이 네 가지 식물은 한결같이 그 생태가 군자의 그것을 닮아,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라 부른다.
“이 사람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 344∼388)가 하루라도 떨어져 살 수 없었던 것은 단금(斷金)의 벗도 아니요,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 대나무였다.
그에게 대나무는 벗과 연인 모두를 아우르는 자신의 분신이자 자신을 경계하는 규범이었을 것이다. 초(楚)나라의 우국시인(憂國詩人) 굴원(屈原, B.C. 343∼278)에게는 난초가 그러하였고, 동진(東晋)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 365∼427)에게는 국화가 그러하였다.
이렇듯 고전적(古典的) 문인들에 의해 그 상징성이 배가된 사군자는 후세 문인들의 공감을 얻으며 문예(文藝)의 소재로 각광받게 된다. 문학 방면에서의 사군자에 대한 찬미는 곧 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져 사군자를 소재로 한 그림이 출현하게 된다.
그중 가장 이른 것은 대나무로 그 기원은 당대(唐代)부터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북송(北宋)대 문동(文同, 1019∼1079)과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이후였다. 매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전 작품이 없어 그 자취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그의 뒤를 이은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해간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야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원초(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그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심회를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국화는 사군자 중 가장 뒤늦게 발달하였다. 송대나 원대부터 그 전조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단일 소재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 이후이다.
이렇듯 사군자가 문인들에게 창작되고 완상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지니는 군자적 상징성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그 기법적 특징과도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문인들이 일상에서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바로 그림이 될 만큼 형사(形似)와 운필(運筆)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송의 문인사대부들에 의해서 대나무와 매화를 중심으로 사군자가 그려지던 즈음, 고려에서도 사군자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이나 고려 모두 과거제도를 통해 문인사대부층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하는 시대 분위기 또한 양자가 동궤(同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에 의해서 묵죽(墨竹)이, 정지상(鄭知常, ?∼1135)에 의해서 묵매(墨梅)가 그려진 후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는 크게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가들로서는 고려의 정홍진(鄭鴻進), 정서(鄭敍), 안축(安軸, 1282∼1348) 등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강희안(姜希顔, 1417∼1464), 신잠(申潛, 1491∼1564), 유진동(柳辰仝, 1497~?) 등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인종(仁宗) 등 군왕을 비롯하여 화원이었던 안견(安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나 조선 전기 사군자는 현전하는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그 기량이나 양식적 특징을 고찰할 길이 없다. 다만 조선 전기 화원들이 그린 몇몇 청화백자(靑華白磁)에 시문(施紋)된 대나무 그림에서 고려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였을 원대 이간(李, 1245~1343)의 묵죽 화풍의 유향(遺響)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실제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군자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은 선조(宣祖) 연간에 이르러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묵죽에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묵매에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 1566∼?)을 들 수 있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인 이정은 소재의 다양성과 복합적 운용, 소재의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하는 화면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하는 조형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으로 한국 묵죽화의 전형을 확립하였고, 어몽룡 역시 압축적이고 간명한 화면구성과 빠르고 강한 운필로 매화의 강직하고 청신한 기운을 기품 있게 그려내 한국 묵매화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한국 사군자의 비조(鼻祖)라 할 만한 이 두 사람이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고유의 이념으로 계승 발전시킨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계 문인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묵죽과 묵매의 양식적 전통은 당대는 물론 조선 후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묵죽은 위빈(渭濱) 김세록(金世祿, 1601∼1689)과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 등이 이정을 계승하였고, 묵매는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오달진(吳達晉, 1597∼1629) 등이 어몽룡을 계승한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그중 오달진의 〈묵매〉는 빠르고 격정적인 필치로 강인한 매화의 상징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화면을 가로지르며 부러진 주간(主幹)은 병자호란 때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그의 동생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의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절개와 충의를 연상시켜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한편 홍진구(洪晋龜, 1650년대∼?)는 비록 수묵화는 아니지만 구륵과 몰골을 적절히 구사하며 담채(淡彩)의 국화를 그려 묵국(墨菊)의 단초를 열어놓는다. 본격적으로 묵국이 그려진 것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에 의해서다. 이번 사군자전에서 우리나라 묵국의 시초에 해당되는 이 두 사람의 국화 그림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성과였다.
조선 말기에 화단의 주류로 떠오른 사군자
묵국이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사군자가 하나의 화목(畵目)처럼 통칭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조선 화단에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사군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正祖)연간 예원(藝苑)의 영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정이나 그를 계승한 유덕장과는 사뭇 다른 유연한 필치로 문아(文雅)한 느낌의 난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경),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 1765∼?),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 등에 계승되면서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
김홍도의 〈백매(白梅)〉는 김홍도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놓고 있어, 강인함을 강조한 기존의 묵매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다. 어렵게 받은 그림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을 즐기던 단원의 마음속에 있던 매화는 기세등등한 매화가 아니고 이 〈백매〉와 같이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였나 보다.
반면 임희지와 신위는 기존 양식을 비교적 충실히 계승하며 유려(流麗)하고 습윤(濕潤)한 느낌의 필치로 격조 높은 난죽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신위는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을 만큼 묵죽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사군자가 화단의 주류로 떠오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여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등 그 문도(門徒)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청대(淸代) 문인화풍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사실성보다는 탈속한 이념미(理念美)를 추구하였다.
국망(國亡) 이후에도 사군자에 대한 애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1835∼1939),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같이 국망의 통한을 한묵(翰墨)으로 자오(自娛)하며 지내던 많은 문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살았던 민영익은 당시 상하이 화단을 압도한 당대 제일의 사군자 대가였다.
일제 이후에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1) 등이 방일(放逸)한 붓질로 난죽을 그려 남기고 있지만, 기법이나 양식적인 진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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