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육조체란 무엇인가?
육조체
<육조체(六朝體)>
근일 서예 전시회마다 소위 육조체 작품 몇 점씩의 출품을 꼭 볼 수 있으며, 경향 서실마다 동호인들의 글씨와 법첩에서도 이 육조체를 많이 본다. 그러나 이 육조체란 옛 북중국과 언어 혈통이 다른 북방 이민족이 중심되어 이룩한 문자체라는 것, 거의 석각(石刻)으로 된 정강(精强)·질박(質朴)·한험(寒險)한 문자요, 더구나 육조(六朝)란 이름은 이 문자문화(文字文化)를 이룩한 북중국의 서안(西安)·낙양(洛陽)의 황하(黃河) 유역이 아니고 남방인 지금의 남경(南京, 당시의 이름은 建康)·항주(杭州) 등 양자강 하류에 이룩한 여섯 왕조의 뜻이기에 모순된 것이다. 따라서 육조체란 관습상 그렇게도 불렸으나 정확히 말해 북위(北魏)의 해서체(楷書體)다. 이 시대를 남북조(南北朝)시대라 하고, 남첩북비(南帖北碑)라 하여 우리 동양의 서예사상 가장 획기적인 시대요, 왕희지(王羲之) 글씨를 배출한 것 또한 이때다.
南北朝時代의 경위
한나라는 전한(前漢, 즉 西漢으로 BC 202∼AD 8년)과 후한(後漢, 즉 東漢으로 AD 25∼220년)으로 약 400여 년 지속되다가 한말에 조조(曹操)의 위(魏)와 손권(孫權)의 오(吳), 유비(劉備)의 촉(蜀)으로 소위 삼국시대가 60년간(220∼280년) 지속된 후 위나라 장군 사마염(司馬炎)이 통일하여 진(晉, 265∼419년)을 세운다. 이 서진(西晉)이 북방민족[胡]인 흉노족(匈奴族)에게 쫓기어 남하, 건업(建業, 즉 建康. 지금의 남경)에 천도하여 동진(東晉)을 열어 약 100년 후인 419년에 멸망한다. 이 진나라 멸망 후 전 중국은 수(隋)에 의해 통일될 때(581년)까지 오나라로부터 약 370년간 남북이 갈리고 여러 왕조가 교체되니 이른바 남북조시대다. 그 다음이 수당(隋唐)으로 이어지니 남북조시대에 성장한 문화가 당나라에 이르러 꽃을 피우고, 그 다음 송(宋)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남북조시대의 남조가 이른바 육조다. 양자강 가의 주로 남경, 항주를 중심으로 여섯 왕조 즉, 오(吳)·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의 여섯 왕조가 수나라에 통일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 동안 북쪽에서는 황하 연안에 서안(西安, 옛 長安)과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이어진다. 여기 오호의 호(胡)는 ‘되 호’, ‘오랑캐 호’라 하여 북방 민족이란 뜻이다. 가운데 있는 한족(漢族)은 꽃이요[中華], 변방은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이라 하여 모두 야인(野人)이오, 오랑캐이며, 호(胡) 또한 북방 오랑캐인 적(狄)이다. 여기에 참여한 다섯 호족은 흉노(匈奴)·갈(塏)·선비(鮮卑)·저(於)·강(羌)의 다섯 호족과, 또한 한족도 세 나라를 세웠고, 그리고 이들 호족끼리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열여섯의 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을 남북조시대의 ‘오호십륙’이라 하고 위에 말한 육조체의 글씨도 이 중 가장 강대했던 선비족의 소산이다.
남북조의 문화
남조 즉, 육조 문화는 양자강의 온난한 기후와 풍광, 풍요로운 생활을 토대로 일찍부터 노장(老莊)과 도교(道敎)가 정착하고, 유교와 불교가 융합하여 귀족문화가 난숙(爛熟)하며 청담(淸談)이 유행하였다. 남조는 가장 위대한 서성(書聖) 왕희지 일가와 도연명(陶淵明) 등 문장가를 배출하였고, 천자문도 이때 나왔다. 남첩북비(南帖北碑)라 하여 남쪽의 글씨는 거의 법첩(法帖)으로, 그리고 글씨체는 행초체로서 전아(典雅) 단정(端正)하여 귀족적이다.
북조 즉, 북위(北魏) 글씨는 비석으로 남아 있고, 위에 쓴 바와 같이 정강(精强), 질박(質朴)하고, 한험(寒險)하여 힘 있고 북방적이다. 남방이 유불선(儒佛仙) 융합인데 대하면 북방은 강한 불교의 색채다.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이 대표적이다. 또 이들 북방적 한험과 질박한 불교적 기질이 우리가 쓰고 있는 소위 육조체 북위 글씨의 기질인 것이다.
이들 오호십육국의 다섯 호족인 흉노·갈·선비·저·강은 당시 중국으로서는 완전한 이민족이오, 적국들이었다. 이들 민족은 다 ‘우랄 알타이어’족으로 혈통이나 언어가 다 중국과 달리 오히려 만주 조선에 가까웠던 나라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의 북조에 참여하고는 문화정책을 달리했다. 오호 중 가장 강대하고 한때 화북(華北)을 다 통일했던 북위(또는 後魏)는 자국의 문자와 언어를 금하고 한문으로 하기까지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북방 민족들
중국이 북방민족에 의해 점령 통치되기는 남북조시대뿐이 아니다. 고려 때 우리 서북방을 자주 침략해 오던 글안 족은 대국 요(遼, 916∼1125년)를 세워 중앙의 송나라를 압박하였고, 역시 북방민족인 몽골족은 중국의 전 영토인 송(宋)을 점령하고 우리의 고려를 포함한 전 아세아와 중동의 아랍, 유럽의 일곽에 이르는 역사상 세계에 가장 큰 원나라(元, 1271∼1368년) 몽골제국(蒙古帝國)을 세웠다. 또한 북방민족 여진(女眞)은 금(金, 1115∼1234년)으로 화북지방의 요·송을 점령 지배하더니 급기야 청(淸, 1616∼1912년)을 세워 전 국토를 지배하는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였다. 이 청나라는 우리나라 고려 말, 조선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접촉이 많았던 나라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인조 5년)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인조 14년)의 두 난리로 우리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청일전쟁(淸日戰爭) 등으로 전 극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후 현대 중국에 이어진다.
이들 북방민족이 중국 민족[華, 漢]의 수 천 년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큰 위협이었던가.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인간이 만든 가장 큰 구축물’인 만리장성을 오랫동안 쌓아 국토를 보호했어야 할 만치 이들 북방민족은 두려움의 존재였던 것이다.
북방민족 문화에의 同化
남북조시대의 북방민족들 특히, 북위의 문화에의 기여는 위에 말한 문자 문화 외에도 정치·경제, 특히 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 큰 유산을 남겼으며, 북위는 불교의 발전 전파에 있어 큰 업적을 동북 아세아 전역에 끼쳤으며, 우리 고구려 등 한반도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몽골이 전 중국과 전 아세아, 아랍, 유럽에 그 강토를 펼치고 있을 때 우리 고려조도 왕도가 강화에 갇힌 채 40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삼별초(三別抄)의 난, 일본 원정 등 큰 국난을 겪기도 했으나 이들 몽골의 원 왕조는 중국 본토에서 큰 한족 문화 사업을 이룩하였음은 간과하기 쉽다. 중국은 이 원조(元朝) 13, 4세기 동안 우선 서예 계에서도 조맹부(趙孟 坦)·선우추(鮮于樞) 등 대가를 배출하였고, 삼국지와 서상기(西廂記) 등의 소설, 희곡(戱曲), 남화(南畵) 등 실로 문화면에 큰 발전을 하였다.
여진족이 세운 강국 청나라 또한 문화면에서 큰 기여를 한다. 경제·과학·농공에서 고증학과 실학으로, 특히 강희·건륭(康熙 乾隆, 1662∼1795년)에 이르는 130년은 실로 중화 문화의 최고봉으로 가장 큰 사전인 『康熙大辭典』 등 많은 역사적 문헌이 발간되었고, 서예계에서도 포세신(包世臣)·등석여(鄧石如)·유석암(劉石庵)·강유위(康有爲) 등 대가가 나왔다. 이들 북방민족들 -오호, 북위, 요(글안), 원(몽골) 청(금)- 모두에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이 강대국들이 한족(漢族)에게는 민족·문자·언어가 다른 이민족인데 중화를 침략해 들어오고는 바로 문화에 동화했다는 점이다. 그 중 중국을 오래 지배한 청나라는 동화한 나머지 고유한 여진의 언어 문자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중화, 한족이 인구도 많고 국토도 넓으려니와 그 문화의 역사적 용량(容量), 따라서 포용력(包容力)이 그 만치 크다고나 할 것인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 끝에 세운 비석 삼전도비(三田渡碑, 原名은 大淸皇帝頌德碑)가 서울시내 한복판 석촌호수 남쪽 가까운 곳에 있음을 상기하자. 삼전도에서 항복 후 청나라 요청으로 여러 우여곡절 끝에 세운 것을 해방 후 또 여러 경위를 거쳐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이 아주 크고 잘 생긴데다 대제학(大提學, 후에 領議政)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의 찬(撰)으로 전면은 한문, 측면은 여진어와 몽고어로 쓰여 있다. 병자호란의 역사와 우리가 쓴 한문과 여진어 즉, 청나라어와 몽고어가 한 비석에 쓰여 있으니 지금 같은 국제화시대에 재미있지 아니한가. 굴욕도 또한 역사요, 그 기록도 또한 문화재인가.
* 자료출처 월간까마:六朝體’의 虛와 實 -異民族 文化에의 同化
육조체란 무엇입니까?
달 담은 샘 조회 250 | 04.06.24 08:02
육조는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위진 남북조 시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육조체라 하면 그 시대때 쓰여진 해서를 일컫는 말이구요...
해서는 크게 당해와 육조해로 나뉘는데,
당해가 아름답고 여성스럽다고 하면, 육조체는 씩씩하고 굳세며, 남성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조체의 대표적 글씨는
장맹룡비, 용문20품, 북위의 묘지명등을 들수가 있습니다.
처음 육조체를 시작하시는 분은
장맹룡비를 가장 많이 쓰고 그런 다음
용문이나 묘지명 이런 순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입니다.
그러나
육조체가 힘이 있고 굳세고 하기 때문에 강한 인상을 줄수는 있지만,
유함이 너무나 부족하고,
또,
글자를 칼로 새겨 너무나도 칼맛이 많이 나기때문에
모필의 필치를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단점이기도 합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항상 행복하시구요..
꾸뻑!!
청난당
잘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04.06.24 15:46
페가수스 자세한 설명이 너무 좋습니다. 헌데,대단히 죄송한 말씀인데요... 해서모두가 유하고 육조 모두가 칼 맛이 너무 많이 나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칼 맛이나는것에 대해서도 시각에 따라서 다른 내용도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이 됩니다. 또한 당비는 칼로 파지않고 다른 도구를 사용한 것인지요? 죄송합니다. 04.06.25 00:07
전형재 상기 내용과 다른이견이 있어 몇자 적습니다 석공의 일부 체의 과장된 새김으로 (아마 漢碑의 장천비?)이상한 형태로 표현된비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석공들은 서예가의 필의를 알아 모필의 필치나 흔적을 보탬이 없이 너무나도 충실하게 표현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묘지명도 그러하고.... 04.06.25 09:22
달 담은 샘 육조의 해서는 그 당시 이체자들도 많았고 또 석공들이 아무리 잘 훌륭하게 돌을 판다고 해도 (물론 당해도 그렇지만) 서예가의 필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팠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물론 용문이나 장맹룡, 묘지명 모두가 각고의 노력을 다해서 새겼겠지만 그래서 원필로 표현되어 있는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04.06.25 11:37
달 담은 샘 석공의 느낌이 전혀 없이 똑같이 글자의 쌍구로만 새겼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지금 현재 나오고 있는 북위의 수 많은 조상기들을 보면 인위적인 조작도 상당히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제가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북위의 탁들을 한번 올려 들리겠습니다...그리고 지적 감사합니다.. 04.06.25 11:40
義石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북위시대의 해서를 설명하시는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북위해' '북위해서' 정도가 맞을 것 같네요. 위진남북조에서 육조는 오 동진 송 제 양 진의 남조이고 북위는 북조에 건설한 나라입니다. 북위시대에는 특히 해서를 많이 썼으므로 북위해서를 일컫는 것 같네요. 04.06.27 02:53